tvN에서 주말드라마로 방영된 <미스터션샤인> 을 보면 40여 년 동안 많은 사건들이 휘몰아칩니다. 내가 평화롭게 지내는 지금 이 순간의 자유는 지난날 이름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목숨을 건 투쟁으로 지켜낸 시간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40여 년 시간 동안 벌어진 파란만장한 사건들이 놀라웠습니다. 이야기 존재의 근간이 되는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알아보고 정리해 보려 합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신미양요를 배경으로 합니다.
드라마 속 시대 배경(1화)
1901년 11월 12일 자 뉴욕 타임지를 보던 카일 소위는 유진과 함께 조선으로 발령받습니다. 조선으로 떠나기 전 유진은 1871년 존 로저스 제독의 보고서를 확인합니다. 이 보고서는 광성보전투에 관한 보고서로 관련 사진에는 전투 후 포로로 잡힌 조선인들이 담겨있습니다. 사진 속 포로들 사이 어린 장포수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신미양요 즉, 광성보전투부터 시작됩니다. 강화도 김판서 집 노비로 있던 유진은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도공 황은산의 집에 숨게 됩니다. 도공 황은산에게 도자기를 사러 온 미국인 선교사와 처음 만날 그날 포격소리를 듣습니다. 그 포격이 바로 광성보전투의 포격소리입니다. 전투가 끝나고, 돌아가는 미 함대에 미국인 선교사는 유진을 데리고 미국으로 갑니다. 나라를 위해 의병활동을 하다 배신자로 인해 이완익에게 애신의 부모는 죽게 됩니다. 의병활동을 하는 동지들의 품에 안겨 갓난아기인 애신은 할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 그해(1875년) 가을 강화도사건이 일어납니다.
시대적 배경
신미양요: 신미(1866)년에 일어난 서양과의 전쟁
- 제너럴셔먼호 사건 :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 시대가 시작됩니다. 권력을 손에 쥔 흥선대원군은 아시아로 세력을 넓히고 있던 미국과 유럽을 오랑캐로 치부하며 그들의 개항 요구를 거절합니다. 1866년 여름, 중국 텐진으로 오가던 미국 무역상선(제너럴셔먼호) 한 척이 평안도 지역에 출현하여 통상을 요구합니다. 평양감사 박규수는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요청도 아니고, 본인 역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며 요구를 거절합니다. 박규수는 식량이 떨어졌으니 도와달라는 제너널셔먼호 선장의 요구를 들어주고 서둘러 떠나라고 전합니다. 하지만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은 떠나기는커녕 평양 안 민가에까지 들어와 약탈을 일삼습니다. 조선군을 즉각 대응하였으나 모든 면에서 열세였습니다. 이때 조선인 7명이 사망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이 발생됩니다. 분노에 찬 백성들이 모두 힘을 모아 셔먼호에 돌을 던지고 극렬히 저항하자 포로를 풀어주었습니다. 그날 밤 평양감사 박규수는 빈 밴에 불을 질러 제너럴셔먼호에 보냅니다. 1866년 9월 5일, 제너럴셔먼호는 불타 침몰하게 됩니다. 살아남은 선원들은 전원 처형당합니다. 이 제너럴셔먼호사건은 이후 1871년 신미양요의 시발점이 됩니다.
- 광성보전투 : 미국은 이후 셔먼호의 진상조사와 개항요구를 3차례 요청하지만, 조선은 셔면호의 생존 선원은 없으며 개항할 의사가 없음을 밝힙니다. 결국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하기로 결정한 미국은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에 명령을 내립니다. 1871년 5월 16일 존 로저스 제독은 5척의 군함과 1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 향합니다. 6월 10일 강화 앞바다에 도착한 미 함대는 조선에 재차 수교 요청하며, 제너럴셔먼호의 생존자 석방을 요구합니다.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미 함대는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합니다. 미 함대가 강화도 손들목을 지날 즈음 조선군이 포격을 가하자 미군은 이를 빌미로 공격을 시작합니다. 광성보까지 진격하게 된 미 함대는 놀라게 됩니다. 조선은 수적으로도 열세였으며 가지고 있는 무기 또한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의 투쟁은 놀라웠습니다. 어재연 장군이 이끈 광성보전투에서 탈영병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미군은 광성보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조선군의 패기와 집념에 크게 감복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겼지만 식량도 떨어지고 사기도 떨어진 미군은 돌아가기로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살아남은 20명 남짓 포로들의 송환에 반대하며 돌아오지 말라 합니다. 하지만 미군은 포로들을 전부 풀어주고, 어재연 장군의 '수(帥)' 깃발을 전리품으로 가져갑니다.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는 2007년부터, 10년의 임대 계약을 조건으로 강화역사박물관에서 보관하며 전시하였습니다. 이후 계약 연장을 통해 계속 전시할 수 있었는데 2024년 3월 16일 미국으로 반환될 예정입니다.
강화도조약
19세기 서양의 열강들이 무력을 앞세워 아시아 국가들을 압박하여 개항시키고 침략하는 것을 보아 온 일본은 조선을 상대로 같은 방법을 취하게 됩니다. 바로 운요호 사건입니다.
- 강화도사건 : 1875년 9월 19일 조선 해안을 탐색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명분으로 강화도 앞바다에 일본 군함 운요호가 정박합니다. 20일에 운요호 선원 14명이 보트를 타고 강화로 접근합니다. 명백한 불법 침입이기에 조선 수군은 방어적 공격을 합니다. 이 것을 빌미로 22일 중무장한 일본 해군은 영종도에 상륙해 조선군과 격전을 벌이고, 민가를 약탈하고, 무기를 탈취했습니다. 이 교전으로 조선군은 사망 40명, 포로 15명, 민가가 피해를 입었으나, 일본군은 가벼운 부상자 2명이 발생합니다. 막대한 피해를 남기고 일본군은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 1876년 1월 30일 일본은 운요호 사건으로 피해를 보았다며 조선에 피해에 대해 항의하며 개항 요구합니다. 당시 일본은 일본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을 무력으로라도 정복하려는 정한론이 팽배했습니다. 조선의 주권이 침해당하는 내용임에도 고종은 박규수 등 개화파와 청의 조언에 따라 1876년 2월 26일 강화도조약을 체결합니다.
- 강화도조약은 총 12개 조항입니다. 조항에는 조선에 머무르는 일본일을 처벌할 수 없고, 해안 측량을 빌미로 언제든 일본 군함이 조선을 드나들 수 있게 하는 등 조선 침략을 염두해 둔 조항들로 조선의 입장에선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조약입니다.